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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리플(XRP)을 처음 샀다가 -10%에 손절하고 시장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24년 말, 회사 동료의 이야기를 듣다가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떠난 사이에 이 시장은 그냥 커진 게 아니라, 금융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었거든요. 비트코인이 열어놓은 흐름이 온체인 금융이라는 새로운 판을 만들고, 그 판이 다시 규제 딜레마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정작 그 흐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만의 블라인드 스팟에 갇혀 눈을 감고 있다는 이야기, 지금부터 써보겠습니다.
블라인드 스팟: 혁명을 부정하는 혁명가들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Bitcoin Maximali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맥시멀리스트란 비트코인만이 진정한 암호화폐이고 나머지는 모두 쓸모없다고 믿는 극단적 지지자를 가리킵니다. 이 시각 자체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선호의 문제이니까요.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달러 스테이블 코인(Dollar Stablecoin)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달러 스테이블 코인이란 1달러의 가치에 고정된 암호화폐로, 테더(USDT)나 USD코인(USDC)이 대표적입니다. 이 코인들은 비트코인이 처음 증명해낸 탈중개 결제 기능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비트코인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던 개념이죠. 그런데 "비트코인이 아니다"라는 이유만으로 이 흐름 전체를 배척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이건 논리가 아니라 종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2024년 말에 XRP를 다시 공부하면서 느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RWA(Real World Asset), 즉 실물자산 토큰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부동산이나 채권 같은 전통 자산을 블록체인 위에 올려놓는다는 발상 자체가 낯설었으니까요. 그런데 공부할수록 이게 결국 비트코인이 뚫어놓은 길 위에서 자라난 개념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맥시멀리스트의 논리대로라면 이것도 쳐다보면 안 되는 영역이 됩니다.
이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즉 자신의 시야 안에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 사각지대가 개인 투자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사각지대는 제도권 금융과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똑같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미카(MiCA) 법안이 그 상징적인 사례입니다. MiCA란 Markets in Crypto-Assets의 약자로, 유럽연합이 2023년 통과시킨 암호자산 시장 규제 프레임워크입니다(출처: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 이상적인 투자자 보호를 목표로 설계됐지만, 결과적으로 테더 같은 달러 스테이블 코인을 유럽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시켰습니다. 이상주의가 현실을 눌러버린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는 스테이블 코인·온체인 금융을 배척하지만, 이 모두는 비트코인이 열어놓은 길 위에 있습니다
- 유럽 MiCA 법안은 이상주의적 규제의 결과로 테더 등 달러 스테이블 코인을 역내에서 퇴출시켰습니다
- 블라인드 스팟은 개인 투자자뿐 아니라 제도권 금융과 정책 입안자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온체인 금융: 11명이 9억 달러를 버는 구조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라는 온체인 파생상품 거래소가 있습니다. 직원 11명으로 연간 순이익 9억 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숫자를 접했을 때 잘못 읽은 줄 알았습니다. 온체인 금융(On-chain Finance)이란 은행이나 중개기관 없이 블록체인 스마트 컨트랙트 위에서 직접 작동하는 금융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탈국경·탈규제·탈은행이라는 세 가지 특성이 핵심입니다.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즉 금융 규제 준수를 위한 전담 인력이 필요 없으니 11명으로도 조 단위 자금을 굴릴 수 있는 겁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조직 중에서 인당 생산성이 가장 높은 형태라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제가 2024년 말에 XRP를 다시 공부하면서 접했던 RWA(Real World Asset), 즉 실물자산 토큰화 개념도 결국 이 온체인 금융이라는 큰 흐름의 한 축입니다. 부동산이나 채권 같은 전통 자산을 블록체인 토큰으로 발행해 거래하는 방식인데, 블랙록(BlackRock) 같은 전통 금융 공룡이 이미 온체인 국채 펀드(BUIDL)를 운용하고 있을 정도로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국경에 상관없이, 규제 비용 없이 자산이 움직인다는 발상 자체가 처음엔 낯설었지만, 하이퍼리퀴드의 숫자를 보고 나니 이게 유행이 아니라 구조적 전환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 하이퍼리퀴드는 직원 11명으로 연 순이익 9억 달러를 기록한, 인류 역사상 생산성이 가장 높은 조직 중 하나입니다
- 온체인 금융의 핵심은 탈국경·탈규제·탈은행이며, 컴플라이언스 비용이 구조적으로 사라진다는 데 있습니다
- RWA(실물자산 토큰화)는 이미 블랙록 같은 전통 금융사가 뛰어든 만큼, 유행어가 아니라 구조적 전환입니다
규제 딜레마: 한국이 지고 있는 게임
한국 금융이 이 시장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기술이 없어서도, 시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제가 직접 접하고 느낀 바로는, 이 생태계 주변을 맴도는 한국 금융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뒤통수 잡히는 것"입니다. 임원이 조사받고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그냥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이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MEV(Maximal Extractable Value) 사건도 같은 맥락입니다. MEV란 블록체인 거래 순서를 조작해 추가 이익을 취하는 행위로, 이더리움 네트워크의 구조적 취약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와 관련한 재판이 열렸는데, 배심원들이 해당 행위가 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못해 무평결로 끝났습니다(출처: 미국 연방검사실(SDNY)). 기술이 법 언어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025년 초부터 지금까지 XRP를 DCA(Dollar Cost Averaging), 즉 일정 금액씩 정기적으로 분할 매수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모아왔습니다. 2026년 8월 현재까지는 큰 수익이 난 상태는 아닙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미국 상원에서 크립토 시장구조법(Clarity Act)이 지연됐다는 소식은 적잖이 실망스러웠고요. 3년 전 코스닥 2차전지 소재주가 1,000원 밑으로 떨어졌을 때도 펀더멘털을 믿고 버텨서 결국 회복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크립토는 아직 제도적 기준 자체가 형성 중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규제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규제 공백이 곧 소비자 보호 공백이었던 2017년의 펌프앤덤프(Pump and Dump) 시장, 즉 세력이 가격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가 빠져나가는 방식으로 개인 투자자를 털어먹던 그 시장을 제가 직접 겪었으니까요. 필요한 건 "규제냐 혁신이냐"의 이분법이 아닙니다. 투자자 보호의 최소 기준은 지키면서도 온체인 금융이라는 상상력을 죽이지 않는 제도 설계, 그게 지금 한국에 가장 필요한 규제 딜레마의 해법으로 보입니다.
- 한국 금융이 온체인 시장에 못 들어가는 건 기술이 아니라 "뒤통수 잡힐까 봐"라는 제도적 공포 때문입니다
- MEV 재판이 무평결로 끝난 것은 기술이 법 언어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 필요한 건 규제냐 혁신이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투자자 보호와 상상력을 동시에 살리는 제도 설계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가 스테이블 코인을 반대하는 이유가 뭔가요?
A. 핵심은 "탈중앙화 순수성"에 대한 신념입니다. 달러 스테이블 코인은 결국 달러라는 중앙화된 법정화폐에 연동되기 때문에, 비트코인이 추구하는 탈중앙화 가치와 충돌한다고 봅니다. 그 논리 자체는 이해가 됩니다. 다만 제가 직접 공부해보니, 그 비판이 "배척"으로 이어질 때 전체 흐름을 놓치게 된다는 게 문제입니다.
Q. RWA(실물자산 토큰화)가 실제로 의미 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유행어인가요?
A. RWA는 부동산, 채권, 금 같은 전통 자산을 블록체인 토큰으로 발행해 거래하는 방식입니다. 블랙록(BlackRock)이 이미 온체인 국채 펀드(BUIDL)를 운용하고 있고 규모가 빠르게 커지고 있어서, 유행어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규제 환경에 따라 실현 속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제 경험상 이 분야는 기술보다 제도 변화를 더 촘촘히 추적하는 게 맞습니다.
Q. XRP를 DCA로 모으는 전략, 지금도 유효한가요?
A. DCA, 즉 분할 매수는 타이밍을 맞추려는 심리적 부담을 줄여주는 방법입니다. 저는 2025년 초부터 꾸준히 해왔는데, 2026년 8월 현재까지 드라마틱한 수익은 없습니다. 다만 크립토 시장구조법(Clarity Act) 같은 제도적 변수가 해소되기 전까지는, 단기 차익보다 구조적 흐름에 베팅하는 방식이 제 판단과 더 맞습니다. 이게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본인의 리스크 허용 범위에 따라 다릅니다.
Q. 한국 금융이 온체인 시장에 진입하려면 뭐가 바뀌어야 하나요?
A. 제가 보기엔 기술도, 자본도 아닌 법적 명확성(Legal Clarity)입니다. 임원이 조사받을 수 있다는 불확실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리 시장이 열려 있어도 들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시에 2017년식 펌프앤덤프가 재현되지 않을 최소한의 투자자 보호 장치도 병행돼야 합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잡는 게 어렵지만, 그게 지금 한국에 필요한 과제입니다.
결론
2017년에 리플을 -10%에 손절하고 나왔을 때, 저는 그게 냉철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냉철함이 아니라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시장 가격이 아니라, 이 흐름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비트코인이 시작한 혁명은 진행 중입니다. 그 혁명의 결과물인 온체인 금융, 스테이블 코인, RWA를 "비트코인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외면하든, "규제가 무서워서" 진입을 포기하든, 결과는 같습니다. 흐름 밖에 서 있게 됩니다. 지금 당장 투자 판단을 바꾸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건 한 번은 제대로 공부할 가치가 있는 흐름입니다.